블랙홀에서 에너지 뺏어오기?!
- SF 작품 속 에너지 ⑦ -
고호관 작가
고호관 작가는 서울대학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과학사를 전공하고 『과학동아』, 『어린이과학동아』, 『수학동아』에서 기자로 활동했습니다. 지금은 기자의 삶을 마무리하고 SF 작가이자 과학 저술가로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하늘은 무섭지 않아』로 제2회 한낙원과학소설상을 받았으며, SF 앤솔러지 『아직은 끝이 아니야』(공저)와 『우주로 가는 문, 달』, 『술술 읽는 물리 소설책 1~2』, 『하늘은 무섭지 않아』, 『우주선 안에서는 방귀 조심!』 등을 집필했습니다. 이와 함께 『수학 없는 수학』, 『진짜진짜 재밌는 곤충 그림책』, 『아서 클라크 단편 전집 1960-1999』, 『링월드』, 『신의 망치』, 『SF 명예의 전당 1: 전설의 밤』(공역), 『머더봇 다이어리』 등을 번역했습니다. |
SF를 읽다 보면, 간혹 황당한 아이디어를 접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 아이디어가 황당하기만 한 건 아닐 때도 있어서 더 재미가 있습니다.
다이슨 구(5편 링크 https://blog.naver.com/energyinfoplaza/222773950093)나 반물질 활용(6편 링크 https://blog.naver.com/energyinfoplaza/222809998571)도 지금 우리의 기술 수준으로 보면 황당한 아이디어에 가깝겠지만, 이번에 다룰 주제는 더 심합니다. 바로 블랙홀을 에너지원으로 활용하자는 이야기입니다. 풍부하고 깨끗하고 안전한 에너지원이야 모두의 바람이겠지만, 블랙홀이요?
블랙홀의 상상도. 빛마저도 붙잡아두는 강력한 중력 때문에 블랙홀 뒤편의 빛이 휘어져서 마치
렌즈처럼 보입니다. © Lola Post Productions
블랙홀은 중력이 극도로 강한 천체입니다. 별은 질량에 따라 서로 다른 최후를 맞이합니다. 태양처럼 가벼운 별은 백색왜성, 그보다 좀 더 무거운 별은 중성자성으로 끝을 맞이합니다. 그보다도 더 무거운, 질량이 태양의 최소 3배 이상인 별은 폭발한 뒤에 수축하면서 블랙홀이 됩니다. 블랙홀의 중력은 매우 강해 빛조차도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이 정도는 많이들 알고 있는 내용일 겁니다. 그런데 빛조차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블랙홀에서 어떻게 에너지를 얻는다는 건지 궁금해집니다.
SF작가들은 사실 그렇게까지 깊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과학자는 아니니까요. 그러다 보니 블랙홀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한다고 하지만 정작 원리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거나 설명한다 해도 실현 가능성은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 대신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펼쳐 놓는 재미가 있습니다.
<닥터후>의 우주선이자 타임머신인 타디스. 얼핏 보면 구식 전화부스처럼 볼품없게 생겼지만 물리법칙을
초월해서 시공간을 가로지르는 엄청난 우주선입니다. 그 막대한 에너지의 원천이 바로 블랙홀이죠. © BBC
스타워즈, 스타트렉과 함께 세계적으로 팬덤이 강하기로 유명한 3대 작품 중 하나인 <닥터후>는 타디스(TARDIS)라는 우주선이자 타임머신을 타고 다니는 타임로드를 배경으로 닥터의 활약을 그리고 있습니다. 타디스는 영국의 예전 공중전화부스와 똑같이 생겼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 보면 안이 무척 넓습니다. 타디스는 시간과 공간의 상대적 차원(Time And Relative Dimention In Space)의 약자인데, 이름값을 하는 거지요.
아무튼 이 우주를 여행할 수 있고 시간여행도 할 수 있는 타디스의 에너지원은 블랙홀입니다. 좀 더 정확히는, ‘조화의 눈’이라는 매우 중요한 블랙홀이 있고, 타임로드들은 여기서 에너지를 얻어 시간여행을 하거나 몸을 재생합니다.
‘조화의 눈’과 11대 닥터의 타디스. 닥터의 일행이 타디스 안에 갇혔을 때 조화의 눈에 근접한 장면입니다.
여기서 조화의 눈은 ‘늘 블랙홀로 변화하기 직전 상태에 있는 별’로 묘사됩니다.
© from “Journey to the Centre of the TARDIS”, BBC
작중에서도 ‘조화의 눈’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수수께끼인데요, 원리는 대략 이렇습니다. 조화의 눈은 중력으로 붕괴해 블랙홀이 되어 가고 있는 중인 별의 시간을 정지시켜 만들었습니다. 별이 영원히 붕괴하고 있는 상태로 있게 만든 것이지요. 그리고 별이 붕괴하는 퍼텐셜에너지를 끌어 모아 에너지로 사용합니다.
시간을 멈추었으므로 별은 영원히 붕괴하는 상태일 테니 이 무한한 에너지를 사용한다는 소리 같습니다. 사실 시간이 멈추었으니 이 퍼텐셜에너지가 방출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지만,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닥터후>는 과학적 고증에 충실한 SF라고 하기는 어려우니 감안해서 봐야겠지요.
‘펜로즈 과정’의 모식도. 자전하는 블랙홀인 ‘커 블랙홀’은 강력한 인력으로 주변의
공간을 함께 회전시킵니다. 이렇게 회전하는 공간인 운동권에 에너지를 지닌
입자가 들어와서 블랙홀로 추락하면 공간 왜곡으로 인해 ‘음의 에너지’를 지닙니다.
만약 운동권에 들어온 입자가 쪼개져서 일부만 블랙홀로 추락한다면,
에너지보존법칙에 의해 블랙홀로 떨어진 부분이 지닌 음의 에너지만큼 에너지가
증가한 부분이 블랙홀 밖으로 탈출합니다. 블랙홀에 입자를 넣었더니 에너지가
늘어난 입자가 튀어나온 셈입니다. 물론 질량은 줄었지만 말이죠. 이러한 원리는 영화
<인터스텔라>에도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보다 좀 더 현실적인 방안으로는 몇몇 과학자가 제안한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호킹 복사를 이용하는 겁니다. 흔히 블랙홀은 무엇이든 빨아들인다고 하지만,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스티븐 호킹은 블랙홀에서 에너지가 방출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양자역학적 효과에 의해 블랙홀에서 열복사가 나온다는 것이었지요. 인공적으로 블랙홀을 만들고, 거기서 나오는 열복사를 모아서 에너지로 활용한다…. 근사하지 않습니까?
또 하나는 저명한 물리학자 로저 펜로즈 경이 제안한 펜로즈 과정입니다. 먼저 우리는 흔히 블랙홀이라고 두루뭉술하게 말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블랙홀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회전하는지, 전하가 있는지에 따라 나뉩니다. 그 중에서 회전하는 블랙홀(커 블랙홀)에서 에너지를 추출하는 아이디어가 펜로즈 과정입니다.
복잡한 이야기는 빼고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회전하는 블랙홀의 운동량을 감소시키면 그만큼의 에너지를 밖으로 빼오는 원리입니다. 호킹 복사를 이용하는 방법이 열에너지를 이용한다면, 이쪽은 블랙홀의 운동 에너지를 이용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아이디어, 혹은 순수한 상상의 힘을 빌어 여러 SF작가들이 소설 속에서 크고 작은 블랙홀을 이용해 에너지를 얻는 모습을 묘사했습니다. 대표적인 하드SF작가인 영국의 아서 클라크는 소설 지구제국에서 작은 블랙홀을 이용해 우주선을 추진하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SF에서 간혹 ‘축퇴로’라는 동력장치가 눈에 띈다면, 그건 블랙홀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한다는 뜻입니다. 축퇴는 물질이 중력을 버티지 못할 정도로 고밀도로 압축된 상태를 말합니다.
고전 SF 게임 ‘알파 센타우리’에 등장하는 ‘특이점 역학’ 기술. 게임에서는 블랙홀의
물리적 특성을 활용한 엔진이나 발전소를 건설할 수 있으며, 게임 내 등장하는 어떤
동력원보다도 강력한 성능을 자랑합니다. 문명 시리즈를 창조한 게임 디자이너
시드 마이어가 제작한 이 게임에는 SF의 수많은 요소들이 놀라운 개연성으로
알차게 담겨 있지요. © Piraxis
SF게임인 ‘스텔라리스’에서는 블랙홀에 발전소를 지어 막대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중독성이 심하기로 유명한 게임 ‘문명’의 SF버전인 시드 마이어의 ‘알파 센타우리’에도 가장 강력한 동력장치로 축퇴로가 등장합니다. 나이가 좀 있으신 분들은 아실만 한 애니메이션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의 마지막에 나오는 뉴 노틸러스 호의 엔진도 축퇴로이지요.
블랙홀에서 에너지를 얻는다는 개념은 아직 아이디어 수준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펜로즈를 비롯한 몇몇 과학자가 가능성 있는 원리를 제시하긴 했지만, 아직 각종 SF에 등장하는 블랙홀 에너지나 축퇴로 같은 게 정말로 가능할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호킹 복사나 펜로즈 원리를 이용한 방법이 정말로 실현이 될지, 아니면 새로운 방법이 등장해 혁명을 불러올지는 오래 오래 살면서 두고 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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