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트릭스’의 생체 전기, 남는 장사일까?
- SF 작품 속의 에너지➃ -
고호관 작가
▶ ① 핵융합 https://blog.naver.com/energyinfoplaza/222659999219 ▶ ② SF가 보여주는 에너지의 미래, 실현 가능할까? https://blog.naver.com/energyinfoplaza/222692376602 ▶ ③ 무궁무진한 ‘물’에서 얻는 에너지는? 수소핵융합, 수력발전, 조력발전 등 https://blog.naver.com/energyinfoplaza/222707318453 ▶ ⑤ 도망가는 태양을 붙잡아라! 태양을 감싸 에너지 생산하는 '다이슨 구' |
고호관 작가는 서울대학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과학사를 전공하고 『과학동아』, 『어린이과학동아』, 『수학동아』에서 기자로 활동했습니다. 지금은 기자의 삶을 마무리하고 SF 작가이자 과학 저술가로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하늘은 무섭지 않아』로 제2회 한낙원과학소설상을 받았으며, SF 앤솔러지 『아직은 끝이 아니야』(공저)와 『우주로 가는 문, 달』, 『술술 읽는 물리 소설책 1~2』, 『하늘은 무섭지 않아』, 『우주선 안에서는 방귀 조심!』 등을 집필했습니다. 이와 함께 『수학 없는 수학』, 『진짜진짜 재밌는 곤충 그림책』, 『아서 클라크 단편 전집 1960-1999』, 『링월드』, 『신의 망치』, 『SF 명예의 전당 1: 전설의 밤』(공역), 『머더봇 다이어리』 등을 번역했습니다. |
2021년 나온 영화 <매트릭스 : 리저렉션(The Matrix Resurrections)>은 1998년에 나온 영화 <매트릭스>의 후속편입니다. 당시 매트릭스는 놀라운 영상미와 연출로 많은 관객을 놀라게 했고, 이른바 사이버펑크 붐을 일으켰습니다. 주인공 네오가 저항군의 리더 모피어스의 설득에 넘어가 알약을 먹고 진실을 알게 되는 부분은 꽤 충격적입니다.
비록 최신작은 비평과 흥행 양면에서 실패를 맛봤지만, 매트릭스 시리즈는
SF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으로 평가됩니다. © Warner Bros. Pictures
이 영화 속 세계에서 인간은 기계와의 전쟁에서 패했고 일부만이 비밀 장소에 숨어 살며 저항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네오가 살던 평범한 세상은 무엇일까요? 사실 그런 세상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네오를 비롯한 수많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좁은 인공자궁 속에서 살고 있었고, 평범해 보이는 세상은 ‘매트릭스’라는 가상현실이었습니다.
영화의 설정에 따르면 상황은 이렇습니다. 전쟁 도중 인간이 기계가 태양 에너지를 이용하지 못하게 막아버리자 기계들은 인간을 붙잡아 생체전기를 뽑아내 사용합니다. 그러는 동안에 정신은 매트릭스 안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평범하게 살아가게 둔 것이지요. 네오는 예언 속의 존재였고, 이후 자유를 되찾기 위한 싸움을 시작합니다.
매트릭스 3부작의 프리퀄 이야기를 담은 매트릭스 르네상스에 묘사된 ‘검은 폭풍 작전’. 기계가 에너지를
얻는 태양빛을 가려버린다는 인간측의 자기파멸적인 이 작전으로 인해 기계는 대체 에너지원을 찾아야
했습니다. © Warner Bros. Pictures
인간을 배터리로 이용해 전기를 뽑아낸다는 건 정말 가능할까요? 우리 몸에 전기가 흐르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18세기 말 이탈리아의 루이지 갈바니는 잘라 낸 개구리 뒷다리에 전기를 흐르게 하면 다리가 경련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이 현상을 설명한 갈바니의 이론이 옳았던 건 아니지만, 생명 현상과 전기가 모종의 관계가 있는 건 분명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뇌세포와 신경이 전기를 이용해 작동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심장이 뛰는 것도 심장 세포가 만드는 전기 신호 때문이지요. 심장 박동에 문제가 생겼을 때 제세동기를 이용해 처치하는 모습을 영상물에서 종종 볼 수 있는데, 제세동기는 순간적으로 강한 전류를 흘려 보내주는 의료기기입니다.
가만히 쉴 때 사람의 몸은 약 100W의 전기를 생산한다고 합니다. 이것을 전부 뽑아 쓸 수는 없을 테니 사람이 목숨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는 남기고 일부를 가져간다고 생각해도 사람의 수가 아주 많다면, 상당히 많은 전기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것을 이용하면 기계를 움직이고 컴퓨터를 돌릴 수 있겠지요.
매트릭스에 묘사된 ‘인간 배터리’. 영화에서 기계는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생체 전기로부터
에너지를 얻습니다. © Warner Bros. Pictures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의문이 생깁니다. 인체가 그렇게 효율적인 발전기일까요? 인간을 이용해 전기를 만드는 기계들은 과연 남는 장사를 하고 있을까요?
당연한 말이지만,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영양분을 섭취해야 합니다. 아무리 가상현실에 접속해 살아간다고 해도 위장으로 음식물을 넣어주든 혈관으로 직접 영양분을 넣어주든 뭔가 먹여야 합니다. 이 영양분을 생산하는 데도 에너지가 들어갑니다.
수많은 인체를 관리하고 전기를 뽑아내 운송하는 등의 시설을 운용하는 데도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인공자궁 속에 있는 인간들을 관리하느라 돌아다니는 로봇도 볼 수 있는데, 이런 로봇이 움직이는 데도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인체 배터리를 이용하기 위해 굳이 없어도 될 로봇을 더 만들어내야 할지도 모릅니다.
또, 하나 생각해야 할 게 있습니다. 바로 가상현실입니다. 영화 속에 나오는 가상현실은 현실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얼마나 넓은 세계를 구현해 놓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정도 가상현실을 만들고 유지하려면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할 겁니다.
영화의 주인공 네오가 가상공간에서 수많은 총알을 막아내는 이 씬은
매트릭스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장면 중 하나입니다. 물리적인 에너지가 아닌,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장면이지요. © Warner Bros. Pictures
이렇게 인체 배터리 공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의 합과 인체로부터 얻을 수 있는 에너지의 합을 비교한다면 어느 쪽이 클까요? 영화 속 정보만으로 계산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쓰는 에너지 이상을 만들어내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만약 제가 인간을 지배하는 인공지능이라면 가상현실 같은 건 만들지 않았을 겁니다. 그냥 의식 없는 상태를 유지하며 전기만 뽑아도 될 테니까요. 어차피 먹이로 쓸 인간들이 가상현실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게 해주겠다는 가상한 생각을 굳이 왜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에너지를 만드는 데는 에너지가 들어갑니다. 100만큼의 에너지를 들여서 80만큼의 에너지가 생긴다면 그렇게 할 이유가 없습니다. 효율적이지는 않아 보이지만, 그래도 이익이 됐기 때문에 인체를 이용했겠지요. 아니면, 다른 에너지원이 아예 없어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거나요.
혹은 원자력 같은 다른 에너지원과 인체 배터리를 함께 이용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인간을 살려놓고 괴롭히기 위한 목적이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상상도 해봅니다. 그게 목적이었다면 가상현실을 끔찍한 지옥처럼 만들어 놓는 게 나았을 텐데, 인공지능이 생각보다 착했나 봅니다.